
[프롤로그] 올해의 나, 잘 지냈을까? (Vol. 2, 25년 12월)
2025-11-01씨앗을 심을 도구
2026년 기록 라인업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은 깨끗한 땅. 이제 우리는 이곳에 2026년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농부가 농사를 시작하기 전 쟁기와 호미를 손질하듯, 저도 새해라는 밭을 일구기 위한 다섯 가지 도구를 준비했습니다. 한 권에 모든 씨앗을 섞어 심기보다, 각 작물의 특성에 맞는 구획을 나누어 주기로 했거든요.
각자의 밭에서 저의 1년을 풍성하게 키워줄 다섯 가지 기록의 도구들을 소개합니다.
1. 5년의 시간을 겹쳐보는 거울
[ 📓 로이텀 5년 다이어리 (Leuchtturm1917) ]


기록 모임에서 우연히 선물 받은 노트인데, 1월 1일부터 시작하려고 소중히 모셔두었어요. 이 다이어리의 매력은 한 페이지에 5년 치의 같은 날짜가 쌓인다는 점입니다. 내년, 내후년의 오늘, 저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요? 5년 뒤에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하지만, 그 두려움이 저를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거라 믿습니다. 하루 5줄, 물을 주듯 짧은 안부를 적으며 제 삶의 나이테를 기록하려 합니다.
사실 5년 일기의 진짜 묘미는 빈칸을 허용하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해요... 허허허. 살다 보면 너무 바빠서, 혹은 아무것도 적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쳐서 펜을 들지 못하는 날도 있잖아요. 그럴 땐 자책하지 않고 쿨하게 비워두려 합니다. 훗날 그 공백을 보며 '이땐 정말 치열했구나', 혹은 '잠시 쉬어갔구나' 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여유. 빽빽한 기록의 의무감보다는, 듬성듬성해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지속의 힘을 이 노트에서 배워보려 합니다.
2. 매일을 지탱하는 단단한 중심
[ 💼 올라이트 가죽커버 + 그리드 노트 ]


제 삶을 운영할 메인 기록인 불렛저널은 올라이트의 그리드 노트와 늘 로망이었던 가죽 다이어리의 조합으로 선택했습니다.
가죽커버는 올라이트 서촌점에서 스크래치가 있는 B-grade 제품을 데려왔어요. 어차피 가죽은 손때가 묻고 흠집이 나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흠집도 멋이야!" 하며 쿨하게 쓰려고요.
이 조합을 선택한 건 '지속 가능함' 때문입니다. 커버 가죽은 시간이 지날수록 멋스럽게 낡아가지만, 속지는 적당한 두께의 노트라 다 쓰면 언제든 가볍게 새것으로 바꿀 수 있거든요. 1년 치의 무게를 한 번에 짊어지는 게 아니라, 가벼운 호흡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해주죠.
불렛저널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나만의 리듬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정해진 틀이 없으니 이번 주는 이런식으로, 다음 주는 저런식으로 내 상황에 맞춰 양식을 바꿔볼 수 있거든요. 그렇게 이리저리 부딪히며 나에게 딱 맞는 형식을 찾아가는 탐험, 그 유연한 자유를 이 노트와 함께 누려보려 합니다.
3. 취향이 깊어지는 서재
[ 📚 트롤스페이퍼 에센셜 노트 ]


책을 읽는다는 건 마음의 토양에 영양분을 주는 일이죠. 이 소중한 양분을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종이의 질감이 돋보이는 트롤스페이퍼를 독서 노트로 정했습니다. 필기감 좋기로 소문난 스웨덴 문켄사 종이 위에 사각거리는 펜촉의 느낌을 온전히 느끼며 문장을 담아보려 합니다. 읽은 날짜와 밑줄 그은 문장, 그리고 책을 덮은 후의 단상을 적다 보면, 제 생각의 뿌리도 그만큼 깊고 단단하게 내려가겠죠?
모든 책을 다 기록하기보다는 제 마음을 '쿵' 하고 건드린 책들만 엄선해서 적어두려고요. 그렇게 1년이 지나 이 노트가 꽉 찼을 때, 그 안에는 작가의 문장이 아닌 '저의 취향'이 남게 되겠죠. 단지 정보가 아닌 나를 발견하는 것, 그게 우리가 계속 읽고 쓰는 이유 아닐까요?
4. 다시 도전하는 배움의 방
[ 🍏 포인트 오브 뷰(POV) 애플 소프트 노트 A6 ]


매년 새해 목표 단골손님, '영어 공부'의 씨앗을 다시 심어봅니다. 이번엔 일부러 손에 닿는 촉감이 부드러운 노트를 골랐습니다.
사실 '공부'라고 하면 책상 앞에 각 잡고 앉아야 할 것 같은 무거운 압박감이 먼저 들잖아요. 그래서 도구만이라도 그 무게를 덜어주고 싶었어요. 이 노트의 말랑한 표지를 쥐고 있으면, 공부가 아니라 마치 가벼운 에세이를 쓰는 듯한 편안한 기분이 들거든요.
원래는 자유롭게 생각을 펼치는 영감 노트로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지에 그어진 반듯한 라인을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마구 뻗어 나가는 날것의 낙서보다는, 이 줄에 맞춰 또박또박 문장을 가지런히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흐트러짐 없이 글씨를 잡아주는 이 라인 위라면, 낯선 영어 문장들도 좀 더 단정하게 제 머릿속에 정리될 것 같았습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며 이 작은 노트를 꽉 채웠을 때, 제 영어 실력도 이 노트의 두께만큼 자라있길 기대해 봅니다.
5. 날것의 생각을 잡는 그물
[ 📒 이토야(Itoya) 노트 ]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영감,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을 놓치지 않고 잡아두기 위해! 동생이 일본에서 사다 준 이토야 노트는 데일리 메모장으로 당첨! 한 손에 쏙 들어오고 360도로 쫙 펴지는 유연함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펼쳐서 날것의 생각들을 담을 수 있어요. 가장 낡고 거칠어지겠지만, 그만큼 가장 생생한 날것의 열매들이 가득 담길 저만의 생각 주머니입니다.
버스에서 흔들리며 쓴 지렁이 같은 글씨, 급하게 찢어낸 흔적, 커피가 튄 자국까지 모두 환영이에요. 가장 지저분한 노트가 될 테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생생한 제 삶의 온도가 담긴 '진짜 기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ditor's Note
이렇게 저의 2026년 농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도구들을 정비하고 나니, 빨리 새해라는 땅에 들어가 흙을 만지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네요.
여러분의 2026년 정원에는 어떤 도구들이 놓여 있나요?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 손에 가장 잘 익은 호미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